킹시국 재택 근무 체험기 - 1

2020. 3. 23. 00:00Random

들어가며

올해는 초장부터 정말 하드코어하다. 19년도 말에 발생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초기 대응 시기를 놓쳐 전세계로 퍼지고 말았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들어본 현대 전염병들을 헤아려 본다. 아폴로 눈병, 사스, 신종 플루, 메르스 등. 전염병 중 어느 것 하나 사소한 것이 없겠지만, 어찌되었건 사태의 심각성은 그간 겪어 왔던 것 중에선 역대급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어 보인다. 정부에서 위생을 뛰어 넘어 '사람들과 만나지 마세요'라고 권고하고, 중고등학교는 개학을 늦추고, 대학교는 원격 강의를 시작했으며, 일부 회사들은 재택 근무를 실시했다. 내가 다니는 회사도 예외는 아니어서, 2월 말부터 본격적인 전사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고, 그 과정에서 느낀 소소한 것들을 공유하고자 한다.

역병이 쏘아올린 4차 산업혁명

'옛날 사람들이 상상한 미래'의 교과서적인 그림. 이정문 화백이 그린 미래 상상도이다. 아래에 익숙한 풍경이 보인다.

'집에서 강의도 듣고, 일도 하고, 진료도 받는다' 이는 우리가 어릴 때부터 많이 상상했던 미래 모습 중의 하나였다. 미래 상상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라, '이 쯤되면 이뤄져있겠지' 싶은 것들은 항상 그 타이밍에 달성되어 있지 않는다. 어떤 건 생각보다 빨리 되고, 어떤 건 현재에서도 실현 가능성이 요원한 것들이 있다. 코로나로 시작한 글인데 갑자기 웬 미래 예측 이야긴가 싶지만, 재미 있는 소재이니 한 번 썰을 풀어보고자 한다.

  • 1991년에 방영한 일본 애니메이션 '사이버 포뮬러'는 우리가 아는 레이싱 F1 대회에 인공지능을 접목한 '사이버 포뮬러'라는 레이싱 경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탑재된 레이싱 카와 레이서가 서로 합을 맞춰가며 경기를 하는 내용인데, 설정 상 이 경기는 무려 2006년도부터 시작되었고, 주인공 카자미 하야토는 2015년에 참가해서 우승을 한다. 자율 주행은 고사하고 전기차도 이제야 보편화를 바라보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는 정말 재미있는 틀린 예측이다. 더 골 때리는 점은, 자동차에 튜링 테스트도 통과한 인공지능이 실리는 그 시대에 데이터 교환을 3.5인치 플로피 디스크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2015년의 청소년들 : 저게 뭔데 십덕아. 클라우드 뒀다 뭐함?

  • 1987년에 발매된 게임 록맨(혹은 메가맨)은, 로봇과 인간이 공존하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와일리라는 천재 박사가 전 세계의 로봇들을 해킹하여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자, 이를 구하기 위해 '록'이라는 가정용 로봇이 '록맨'이라는 전투 로봇으로 개조를 받아 인류를 구하러 나선다는 내용이다. 이 시놉시스의 배경은 200X년도다. 저 X에 어떤 값이 들어가든 2010년 이전일 테니, 이 또한 유쾌한 예측 실패라고 할 수 있겠다.

200X년도는.. 인간같은 로봇은 커녕 "스마트 폰을 누가 삼? 바본가" 소리가 나오던 시대였다

미래 예측이 말처럼 쉬웠으면 애초에 코로나 관련해서 재택근무 글을 이렇게 블로그에 쓰고 있지도 않았을 테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사례들을 보면, 어떤 기술은 생각보다 정말 빨리 개발되어서 우리 생활에 도입이 되었고, 어떤 기술은 우리의 예상보다도 넘어야 할 장벽들이 많아서 우리 곁에 아직 다가오지 못 하고 있다. 그러나, "원격 근무, 원격 교육 시대"는 "이미 도래한 세상인가? 곧 도래할 세상인가? 도래하지 않을 세상인가?"의 어느 부분에 속하는 지 판단하기가 참 애매하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 기반은 갖춰져 있지만, '직접 대면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인식이 팽배해 일부 분야에서만 한정적으로 사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적어도 '원격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시대'가 오려면, 최소한 '면대면보다 온라인이 더 낫다'는 전국민적 여론이 형성되거나, 정말 집에 있어도 회사나 강의실에 있는 것 같은 경험을 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이 발명되어야 할 줄로 알았다. 그런데 이 논의를 앞당긴 게 다름아닌 역병이라니! 정말 미래는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다.

라인은 원래부터 원격 근무가 가능한 회사였다. 1달에 한 번 원격 근무를 신청할 수 있었기에, 이번 전사 재택 조치가 마냥 낯설지만은 않았다. '한 달에 한 번 해 왔던걸 그냥 오래 하게 되겠거니' 정도로만 여겼는데, 이는 내 오산이었다.

그동안은 원격 근무? 지금부턴 재택 근무

가장 큰 차이는, 이번 재택은 정말로 '재택 근무'였다는 점이다. 그동안 회사에서 제공했던 원격 근무는 정말 말 그대로 Remote Work였으므로, 꼭 집에서 근무해야한다는 규정은 없었다. 오히려 입사 하고나서 지금까지 집에서 원격 근무를 한 횟수가 현저히 적었다. 나 자신의 성향을 뻔히 알고 있으니, 방 안에만 있으면 딴 짓을 자꾸만 하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취준생 시절에 하던 것처럼 분위기 좋은 카페에 나가서 귀에 이어폰을 꽂고 노트북을 두드리다가 집에 들어가곤 했었다.

고향에 내려가 원격 근무를 한 적도 있었다. 집 뒤의 카페에 앉아 '어떻게 해야 사랑받는 신입 사원이 될까'를 진중하게, 머리털이 빠지게 고민했던 지난 날이 스쳐지나간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이번 전사 재택이 내려진 이유는, "출퇴근을 막음으로써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함"이었다. 즉, 집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내려진 재택 근무 권고였다. 그런 상황에 공공 장소인 카페를 가서 근무를 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행위였다. 눈물을 머금고 집콕을 시작했다. 근무 기간동안 집 밖으로 나간 시간은 오로지 장 보러 갈 때 뿐이었다. 물론, 그 잠깐 동안에도 마스크를 잊지 않았다.

OO하고 한달 버티기. 도전?

처음에야 '아침에 나갈 준비를 안 해도 되니 편하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집에서 맥북만 바라보는 나날이 계속되니 정서적으로 내가 닳아지고 있음을 느꼈다. 처음으로는 식사가 크게 다가왔다. 평소에 판교에서 식사를 해결하므로 집에는 요리 도구조차 제대로 안 갖춰진 상태였기에, 재택 초반에는 배달의 민족으로 끼니를 때웠다. 그러나 금액도 금액이거니와, 식당에서 오는 음식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담겨있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도 없어 늘 시킬 때마다 불안해 해야했고, 무엇보다 이렇게 끼니를 때우다보니 '코로나 걸리기 전에 영양 실조로 죽겠네'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고민 끝에 자취 요리를 다시 시작했다. 근 2년만이었다.

세상 쓰잘데기 없는 논쟁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마냥 남일 같지는 않다.

운동 부족도 크게 다가왔다. 원래 개발자라는 직업 자체가 활동적이지가 않아 만성 운동 부족에 시달리곤 한다. 평소에도 몸을 잘 안 움직이던 나는 입사하자마자 체력 부족을 절실히 체감했고, 그래서 살고자 링 피트 어드벤처를 사야만 했다. 이는 본의 아닌 빅 픽쳐가 되었는데, 구매 이후로도 링 피트 가격은 떨어지기는 커녕 오르기만 했고, 지금같이 집 밖으로 안 나가는 상황에서는 홈 트레이닝 외에 마땅한 운동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재택 실시 이후로는 링 피트를 아예 안 하고 있다)

거의 반년간 정가로 떨어지지를 않는다. 이 시국이니만큼 앞으로도 가격은 계속 이지랄일 것으로 보인다.

집이 곧 회사요, 회사가 곧 집이니라

'업무 공간과 휴식 공간이 더 이상 분리가 되지 않는 것 같다'는 직장인이나 학생이나 교수나 직업을 막론하고 모두가 입을 모아 하는 이야기 같다. 특히나 가정이 있는 분들에겐 이게 더 크게 다가왔는데, 근무용 공간이 따로 없어서 아이 방에서 근무를 하는 사례도 들려왔고, 업무 도중에 가족의 호출 등 인터럽트(?)를 당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 듯했다.

예전에 BBC 방송에서 아이가 캘리 교수의 방에 난입해 방송사고가 터진 적이 있다. 이젠 우리가 화상 회의에서 이런 일을 겪고 있다(...)

물론 이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일단 회사에 나오게 되면 가정사의 처리는 힘들어진다. 집에서 근무할 경우에는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겨도 바로 처리 후 돌아올 수 있다는 매우 강한 장점이 있다. 특히나 보육 기관과 학교가 휴교한 지금에서는, 오히려 가정만이 아이를 책임질 수 있는 상황이다. 온전히 개인의 업무에만 집중하기가 힘들어졌지만, 그 대신 반드시 해야할 일을 처리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자취생인 내 입장에서는, 집에서 자고 일어나면 그게 출근이 되고, 맥북을 덮고 누우면 그게 퇴근이 되는 상황이 되니, 집을 온전히 휴식 공간으로 인지하기가 힘들어졌다. 생각보다 '공간'에 대한 사람의 인지는 깐깐하다. 집이 있는데 왜 굳이 사람들은 비싼 돈 내고 독서실을 가고, 인강을 들으면 될 일인데 왜 굳이 사람들은 학원에서 유명 강사의 강의를 들을까? 공간에 대한 인지가 작업의 효율을 결정해주기 때문이다. 재택근무가 장기화되면서 나에게 집은 더 이상 일 터도 휴식 공간도 아닌 애매한 중간 공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나온 나만의 특단의 대책은, "회사에 나온 것처럼 옷 입고 일하기"였다. 편한 옷을 포기하고, 다소 불편하더라도 정말 밖에 나갈 때와 같은 옷을 입고 근무하는 것. 그렇게 되자 더 이상 평소처럼 막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어느 정도 자구책이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