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신정 맞이 한라산 등반기

2019. 12. 22. 03:19Random

들어가며

벌써 2020년 1월 1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저는 2019년 신정 한라산 등반기를 쓰고 있구요. 예전부터 이 기록은 꼭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그 다음 신정이 다가올 때에나 글을 쓰게 되네요. 미약하게나마 저의 경험담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건의 발단

2018년 겨울의 일이다. 당시 졸업 논문 제출도 끝내고 명실상부 백수의 신분이 되어 탱자탱자 놀고 있었는데, 대학 동기들로부터 '연말맞이 여행을 가보자' 는 제안을 받았다. 당시 여행지는, 어째서인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부산, 울산, 제주도의 세가지 후보가 있었는데,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누군가가 "한라산에서 일출보기! 괜찮다!" 고 외쳤고, 그 친구가 찾아온 한라산의 새해 사진들을 보는 순간 우리는 망설일 여지 없이 제주도행을 결정했다.

이런 걸 보고 어떻게 안 갈 수가 있겠어

당시에는 '이런 고생도 이렇게 젊을 때나 하지, 나중에 되어서나 해보겠어?'라는 그야말로 젊은이의 패기가 넘치는 생각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물론 산을 오르는 순간 후회했다.

한라산 야간산행, 사전조사

  • 한라산을 밤에 오를 수 있나?

1월 1일은 야간산행이 허용된다고 한다. 생각보다 신정맞이 한라산 등반을 하는 사람들이 많더라.

  • 준비물은 뭐가 있지?

따뜻한 복장(내복, 패딩, 털모자, 두꺼운 양말 등..), 핫팩, 보온병, 등산스틱, 아이젠 (필수), 초코바, 컵라면, 쓰레기봉투, 헤드랜턴, 등산화, 등산양말 (여벌로 챙기는 것을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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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아이젠은 필수다. 한라산은 고도 때문에 기후 자체가 냉대 기후에 속한다. 눈길을 무조건 걷게 되므로 목숨이 소중하다면 아이젠을 들고 오는 것이 좋다. 없으면 등산 전에 매점에서 살 수 있다. 아이젠을 쓰면 평지를 걸을 때 발이 많이 아프긴 하지만, 얼음길에서 미끄러져 크게 다치는 것보단 싸게 먹힐 것이다.

산에서 이런 사태가 생기면 꽈당큐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사진은 군필자들에게 매우 친숙한 그 핫팩

핫팩도 챙겨두면 좋다. 발이 차가워질 수도 있으니 발에도 넣으라고들 권장하는데, 난 개인적으로 추운 날씨에 언 손으로 핫팩 까는 것조차도 번거롭고, 힘들다 느껴져서 등산 중에는 핫팩을 많이 까지 않았다. 성능 좋은 놈은 어차피 뜯어놔도 오래오래 가니 그냥 처음부터 다 까놓고 올라가는 게 나을 듯하다.

이게 그 포탄입니다 포ㅌ.. 아 이게 아닌가

오르는 길에 물은 무조건 필수다. 땀을 무진장 흘리게 되니 갈증이 시도때도 없이 찾아온다. 특히 몸에서 나는 열로 더워져서 물을 찾게 되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래도 따뜻한 물을 추천한다. 호흡으로 오고가는 공기는 차디찬데 그 안에 찬물을 들이부으니 처음에는 시원하다 느끼다가도 나중엔 기침만 더 심해지고, 감기기운이 생기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또, 진달래 대피소에서 컵라면을 많이들 먹게 되는데, 라면을 위해서라도 보온병은 필수다.

뭐니뭐니해도 야외활동 컵라면은 육개장이 국룰

컵라면은 육개장을 추천한다. 너구리같이 면발이 굵은 컵라면은 추운 날씨에 따뜻한 물을 부어서는 절대 익지 않는다. 물론 보온병도 성능이 좋은 것들이 많긴 하지만.. 산에서 먹을거라면 육개장같이 면발이 얇은 것을 택해야 한다. 그리고, 컵라면을 먹기로 결정했다면 쓰레기봉투는 꼭, 무조건 챙겨가자. 그 곳엔 쓰레기 버릴 곳이 없으니.. 성숙한 문화시민이 되도록 합시다 찡긋.

  • 등산 코스?

한라산에는 본디 여러가지 등산 코스가 있으나.. 야간산행 때에는 관음사와 성판악 코스만 허용된다. 특징은, 관음사는 짧지만 빡세고, 성판악은 오래 걸리지만 그나마 여유롭다. 난 체력 저질이었으므로 바로 성판악 코스를 골랐다. 성판악을 택할 시, 정상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5~6시간이 나온다.

야간산행 시작

11시쯤에 호텔을 나와서 성판악 코스 입구쪽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도착하니 등산객들이 벌써부터 북적거렸고, 00시 카운트다운이 끝나자마자 등산을 시작했다. 

처음에야 다들 폰으로 동영상도 찍고, 장난도 쳐가면서 올라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모두가 말이 없어졌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안에서는 다리가 터지는 듯했고, 밖으로는 살얼음같이 찬 공기가 계속해서 내 호흡기를 때렸다.

진달래 대피소는 세상의 종말을 피해 도망 온 곳 같았다.

특히, 진달래 대피소에 도착했을 때, '우리가 너무 일찍 출발했구나' 싶은 후회를 했다. 4시 즈음에 도착을 했는데, 그 곳에서 정상까지 끽해야 1시간 30분 정도로, 바로 올라가도 일출 시간까지 1시간을 넘게 서서 기다려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던 것이다.

'눈물 젖은 육개장을 먹어보지 않은 자와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명언이 떠오른다.

자리를 잡고 앉아 육개장을 만들어 먹으며 시간을 때우는 것도 잠시, 20분 이상을 아무 것도 안하고 앉아만 있자 다시 몸이 차가워졌다. 대피소에서는 안내방송으로 현재 체감온도가 영하 20도임을 알리고 있었고... 이 때가 제일 고비였던 것 같다.

물론 힘든 것과는 별개로, 한겨울 밤의 한라산은 정말 조용하고, 정말 예뻤다. 너무 고요해서 뽀드득뽀드득 눈이 밟히는 소리만 들렸고, 그마저도 정말 조용해서 무음실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때 너무 추워서 DSLR을 오래 꺼내지 못했는데, 집에 와서 사진을 보정하다보니 이 때 조금만 더 버텨볼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렇게 고대하던 일출...?

결론부터 말하자면 일출은 못 봤다. 날씨가 많이 안 좋았고, 이미 그럴 것이란 걸 일기예보로 알고 있었고,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가지고 오른 것이었지만 자연은 엄격했다. (듣기로 신정 한라산 새해맞이를 성공하는 케이스가 드물다고 한다. 통계적으로 일출을 못 보는 해가 더 많았다고.)

이게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모르는 사람이 보면 히말라야 등산가 뺨치는 비주얼이다.

정상은 눈보라가 끊임없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당연히 일출 시간이 지나도 해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으며, 우리 셋은 모두 허탈한 표정을 짓다가 쓸쓸하게 하산했다. 일출 찍겠다고 DSLR까지 대동했던 나는 억장이 와르르 맨션이었다.

예상은 했던 부분이지만, 하산도 등산 못지않게 힘들었다. 특히 등산 9시간째를 돌파하고 나니, 이건 뭐 산을 내려가는 건지 산이 나를 내려가는 건지... 머릿 속으로는 '우린 이미 등산하다 죽었고, 영혼이 되어서 이승을 떠도는 환상을 보는 중 아닐까?' 싶은 망상까지 하고 있었으니 당시 내 육체 피로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만 하다. 그렇게 11시간을 걸친 등산이 끝이 났고, 우리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저녁까지 기절했다.

졌지만 잘 싸웠다!

일출을 못 봤다는 점이 한으로 남긴 했으나, 여러모로 신정맞이 한라산 등반은 나에게 보람찬 이벤트였다.

내 주변 지인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내 체력은 정말 저질이다. 친구들한테도 '넌 도대체 안 아픈 날이 언제야?' 소리를 들을 정도. (맨날 아픈 건 아닌데 억울해..) 그런 내가 한 겨울에 야간산행을, 그것도 남한에서 제일 높은 한라산을 한다고 했으니 스스로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만큼 등반에 성공했을 때에는 만족감이 컸고, 내적으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를 얻었다.

우연한 사건에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번 한라산 등산은 새해의 좋은 시작이 되었던 것 같다. 그래, 산의 정기를 받았다면 받은 것일까. 올해 나는 백수 생활을 청산하고 동경하던 기업에 취직했고, 같이 올랐던 동기도 소니에 취직함으로써 일제히 백수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 지금도 우스갯소리로 한라산 버프를 받았다고 이야기를 하곤 한다. 앞으로도 기억에 오래 남을 좋은 경험이 된 것 같다. 이번 2020년에도 오를 거냐고? 그럴 바에야 재입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