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에 160만원을 태워? 허먼 밀러 에어론 사용기

2021. 8. 26. 01:32IT/Review

들어가며

허먼 밀러,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의자입니다. 그리고 이 명성의 8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미친 가격에서 온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이게 도대체 뭐 해먹는 의자길래 이런 가격에 팔리고 있는 것일까요? 저도 아마 지금 회사에 입사하지 않았으면 이 의자의 존재조차 몰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도 검소한 나.. 이게 아닌가?

이 글은, 비록 할인을 받았으나, 허먼 밀러 에어론 2대를 사 본 구매자로서 솔직한 사용기를 적은 글입니다. 의자는 직접 체험해보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글로 최대한 뭔가를 전달해보겠습니다.

구찌 의자와는 다르다, 구찌 의자와는!

"내 의자 정가 160만원짜리임" 이라고 말하고 다니면 주위의 반응이 대체로 비슷합니다. 심지어 두 대나 샀다고 하면 다들 경이롭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뿌듯함을 느껴야할 지 부끄러움을 느껴야할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하튼 그렇습니다.

다행히도 최근 어떤 사건으로 인해 적어도 까이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인(?)이라면 다 눈치채셨겠지만, 모 스트리머가 최근에 1000만원짜리 구찌 의자를 삼으로써 저같은 소비자는 쨉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공증해주고 말았습니다.

염따의 '명품을 직접 사봐야 비로소 보이는 게 있다'라는 말에 넘어가 구매했다는데.. 시청자들의 웃음을 위해 기꺼이 천만원을 희생하는 침착맨의 훌륭한 인품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침착맨은 실제로 구찌 의자를 받고나서는 현실 부정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는데요, 바로 가격 천만원이나 하는 그 의자가 바로 '폴리에스테르' 재질이었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는 여러분의 옷과 동일한 재질의 의자를 천만원이나 주고 산 것이죠. 이 세상에 폴리에스테르 의자를 이 가격을 주고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래도 허먼 밀러 의자 구매하는 사람은 아주 평범한 축 아닐까요?

사실 농담으로 던진 말입니다. 허먼 밀러는 사실 이런 조롱거리로 삼기에는 이 의자계(?)에서 꽤나 강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가격 책정이 다소 납득이 가지는 않으나, 확실히 다른 의자와는 비교되지 않는 강점들이 있어 오랜 기간 꾸준히 팔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 회사 좋다. 복지 진짜 신경 많이 쓴다!' 를 주장하는 회사들에게서도 지속적으로 사랑을 받는 의자이기도 합니다. 특히나 '초록색' IT 대기업 계열사가 이 '허먼 밀러 복지'를 대대적으로 앞세웠기 때문에 한 때 '네X버 의자'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럼 뭐하냐고; 회사를 안 가는데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할까요. 전세계적 팬데믹이 도래하고 나서 IT업계는 그나마 좀 괜찮은 바람이 불었습니다. 재택근무의 확대가 그 중 하나였죠. 반강제적으로 재택 근무를 실시하고 나서, 반응이 좋으니 완전 재택으로 정책을 바꾸는 회사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회사에 통근을 해야 받을 수 있는 복지'는 사실상 유명무실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직원을 위해 이런 비싼 의자를 건물에 들였다! 하지만 근무는 집에서 하렴' 이런 상황이 된 것이죠.

회사에서는 이런 상황을 제대로 캐치했던 것 같습니다. 다들 재택근무에 어느 정도 적응했다 싶을 때,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허먼 밀러 에어론 할인 판매' 공지가 올라왔습니다. 재판매를 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본래 정가에서 절반이 넘는 비율을 깎아주는 파격적인 프로모션이었고, 이 공지에 대한 직원들의 반응은 매우 뜨거웠습니다. 평소에도 '이 의자가 집에도 있으면 참 좋을텐데' 싶었던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아무리 파격적인 할인율이라 하더라도, 본래 가격부터가 넘사벽이었기에 할인된 가격으로도 어지간한 의자 두 세개는 거뜬히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의자를 이 가격에 살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으며, 은퇴 때까지 계속 의자에 앉아서 모니터 쳐다봐야 하는 직종임을 감안한다면 구매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뭐, 허리 다 망가져서 평생동안 고통받으며 천문학적 병원비를 지출하는 것을 지금의 돈지랄로 막는 것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한 셈입니다.

구경이나 해봅시다. 허먼 밀러 에어론

누가 '야 이거 가격 ~~~야' 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절대 모를 것 같은 비주얼입니다. 하기야, 1000만원 짜리 의자도 그런 마당에 어떻게 허먼 밀러에서 부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나름 간지나는 디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델 덕에 5만원 짜리 의자처럼 보이네요

특징은?

허먼 밀러 공홈에서 확인 가능한 에어론의 옵션들

허먼 밀러 에어론은 옵션을 여러가지 제공하고 있습니다. 풀 옵션이 제일 비싸고, 기능 한 가지씩을 제외할 때마다 가격이 내려갑니다. 회사 내부에서 판매된 에디션은 단일 옵션으로, 풀 옵션에서 팔걸이 조절 기능이 빠졌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허먼 밀러 에어론에서 제공하는 기능(?)들은 대략 아래와 같습니다.

  • 높낮이 조절
  • 틸트 텐션
  • 틸트 리밋
  • 팔걸이 조절

틸트는 등받이의 기울기를 의미합니다. 빡세게 조인다면 90도에서 안 넘어가서 ㄴ자로 근무가 삽가능합니다.

재질은?

죽부인 저리 가라할 수준의 통기성
집사 분들께 희소식. 스크래처 기능도 겸하고 있습니다 ^^

허먼 밀러는 받침의 재질이 메시(축구 선수 아님)입니다. 통풍이 잘 되므로 여름에도 편하게 앉을 수 있습니다. 시x즈나 리x트, 듀x백 같은 의자들은 대체로 오래 앉다보면 땀이 차서 불쾌했던 경험을 한 번씩은 해봤는데, 메시 재질은 그럴 걱정이 없습니다.

구매한 지 한 달만에 쌓인 먼지들...

단점이 한 가지 있는데요, 먼지가 정말 잘 낍니다. 주기적으로 분리해서 닦아줘야 합니다. 또, 듣기로는 얇은 재질의 옷들은 메시 구멍 사이에서 갈려 찢긴다(!)는 충격적인 경험담도 있습니다.

하지만 레이온 소재의 잠옷을 입고 앉아보기도 했는데, 저는 현재까지 그런 현상을 경험해보진 못 했습니다.

승차감(?)은 어떤가요?

탄력이 매우 강합니다. 과장 좀 보태서 아가들에게 트램펄린 대용으로 쓰게 해도 될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진짜로 시도하진 마세요.

앉는 부분과 등받이가 몸을 잘 받아준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특히, 앉는 부분에 좋은 점수를 주고 싶은데요. 지금까지 앉았던 의자들은 앉는 부분이 딱딱해서 오래 앉으면 궁댕이가 아팠습니다. 그러다보니 결국엔 방석을 따로 사서 앉아야만 했는데요, 허먼 밀러는 오래 앉아 있어도 궁댕이에 가해지는 부담이 매우 적습니다. 이 의자로 기변한 이후로는 저는 도넛 방석을 저희집 막내에게 물려줄 수 있었습니다.

도넛 방석아! 막둥이랑 싸우지 말고 사이 좋게 지내야한다~

등받이도 칭찬할 만 합니다. 틸트를 90도로 고정하고 ㄴ자로 근무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부분은 상체를 뒤로 기울여본 경험이 있을텐데요, 이 때 허먼 밀러의 등받이는 픽 넘어가지 않고, 하단 부분에서 받아주는 느낌이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국민 체조의 그 등배 운동을 앉아서 하는 느낌을 조금 받을 수 있습니다. '조금'입니다.

머가리가 없어요 ㅠㅠ

허먼 밀러 에어론 : 죽여줘...

허먼 밀러 측에서는 '우리 의자는 갓-인체공학적인 디자인이라 헤드 레스트를 안 써도 됨'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허먼 밀러 공식 헤드 레스트는 판매되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 호환되는 헤드 레스트들은 몇 가지 있는데, 이 녀석들도 가격만 놓고 보면 다른 티어 의자를 살 수 있을 정도라 또 고민을 하게 됩니다.

아; 무슨 의자 헤드레스트 하나 붙이는 데 의자 가격이 나오냐고 (출처 : atlasheadrest.com )

헤드 레스트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의견이 갈리는 편입니다. "없어도 아무 상관 없던데?" 라는 의견이 있는 반면, "헤드 레스트도 좋은 거 사면 느낌 다름"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저는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은 듯"이라 생각하며 쓰고 있습니다.

A/S는요?

무상 보증 기간 12년으로, 다른 의자 브랜드와는 비교도 안 되는 서비스를 자랑합니다. (찾아보니 시X즈, 듀X백, 리X트 의자들은 대체로 다 1년 무상 A/S입니다)

다만, 고장 정도에 따라 재수 없으면 몇 개월이 걸린다고는 합니다. 이는 모든 부품이 한국에 재고가 넉넉히 있는 게 아니라, 불가피할 경우에는 해외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보증 기간이 굉장히 길다는 점은 큰 메리트지만, 사실 높은 가격 형성에 일조하는 요인이 아닌가 싶기도 해서 살짝 심경이 복잡하긴 합니다.

이 의자에 앉기만 하면 건강해지나요?

허먼 밀러 에어론은 이 아저씨가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의자도, 사용자가 마음 먹고 비뚤어지게 앉으면 소용 없는 건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다만, 바르게 앉으려고만 하면 정말 좋은 의자가 될 것입니다. 궁댕이와 등에 가는 부담을 많이 분산시켜주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읽으셨으면 대강 눈치채셨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안락한 의자'와는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이 의자에서 소파같은 푹신함을 기대하시면 곤란합니다.

가격을 보니 제 허리가 나았습니다. 돈 값을 하나요?

복합적입니다.

왜 제품들의 가격은 성능과 직선 비례하지 않는 것일까요?

전자기기를 살 때 늘 마음에 들지 않던 게 있었습니다. A라는 기기를 산다고 칠 때, 10의 성능을 가진 기기가 5만원이라 치면, 20의 성능은 10만원, 30의 성능은 20만원으로 선형적으로 증가하다가, 갑자기 40, 50 성능의 기기는 없고 난데없이 70의 성능의 기기가 등장하면서 가격은 150만원을 불러버리는 경우를 너무 자주 봤습니다. 중간 라인이 갑자기 사라지는 건 둘째 치고서라도, 성능은 2배 가까이 올라가면서 가격은 5배 가까이 올라가 버리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죠. (물론, 성능 2배 올린다고 제작비가 2배가 되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유명한 기업이라면 모니터 스탠드를 120만원 상당에 팔아도 구매자가 생깁니다.

하지만 "난 이게 꼭 필요하니 이 가격을 지불하고라도 사겠어" 라며 구매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제품은 결국 그 가격이 적정선이 됩니다.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지점이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어느 카테고리건 상위 티어 제품들이 직관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높은 가격대를 형성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잘 나간다는 여러 기업에서 이 의자를 굳이 사는 것은 단순한 명품 소비 심리는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실사용을 해본 저도 다른 의자와의 차별점이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허먼 밀러 에어론이 꾸준히 팔리는 것은, 이 의자만한 만족감을 주면서 가격 경쟁력을 갖춘 제품이 시장에 없다는 의미로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허먼 밀러 에어론이 돈값하느냐? 에 대한 답은 '구매자의 만족도에 달렸다' 라는 지극히 정석적인 답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쓴 글을 포함해, 여러 리뷰들을 참고하여 '내가 사도 되는 의자인지 아닌지'를 가늠해보시는 걸 추천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