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9. 6. 01:21ㆍRandom
마지막 통근
예상과는 달리 재택 근무 기간이 확장되었다. "우리에게 맞는 새로운 근무방식을 찾는다"는 명목으로 올해는 근무 방식 탐색의 해가 되었으며, 우리 팀은 2020년동안 계속 재택근무를 하기로 했다. 다른 사람들도 "이 정도로 파격적인 선택을 할 줄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정확히 어떤 생각에서 이런 선택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보여주기식 복지같은 게 아닌, 말 그대로 '회사의 새로운 근무형태'를 찾기 위한 경영진의 열망(?)이 담겨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전해져왔다. 올해의 나의 통근은 8월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그 이후로는 아이맥과 맥북을 바리바리 싸들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재택 근무 Phase 2 -> 그라운드 룰을 정하다
코로나 감염을 우려하여 시작했던 재택근무였지만, 이번 재택근무 연장의 배경은 새로운 근무 형태 탐색과 실험이라는 다른 목적이었다. 한 달에 한 번의 원격 근무를 쓸 수 있던 시절에도 '재택을 쉬는 날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럴 거면 휴가를 써라'라는 HR의 당부가 있었다. 이번에는 근무의 디폴트 형태가 원격이 되는 것이므로 더 확실한 룰들이 붙어야 했다. "통근을 하지 않으면서 업무 효율을 높일 수 있는 방법"에 대한 탐색이 우리의 다음 과제가 된 것이다. 장기화된 재택 근무로 중간 중간 퍼포먼스가 떨어질 때가 있었던 우리 팀은 몇 가지 그라운드 룰을 따르기로 했다.
1. 화상 회의, 카메라를 끄지 말아라
예전에 썼던 글에서 '처음엔 다들 카메라를 켜더니, 언제부턴가 다 카메라를 끄고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라고 쓴 적이 있었다. 왜 카메라를 껐을까? 첫째로는 내 못생긴 얼굴을 보는 것은 샤워할 때로 족하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의사소통은 단순히 문자와 음성만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생각보다 "행동 언어"에서 오는 영향이 크다. 내 친구들은 가끔 "카카오톡으로 대화하면 상대방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이 사람이 무슨 의도로 나한테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파악하기 어렵다"는 말을 한다. 이렇듯 얼굴을 볼 수 없는 상대와 대화를 할 경우, 내가 한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을까? 아니, 그 전에 상대방이 딴짓을 하느라 내 말을 놓치는 건 아닐까? 등의 불안감을 늘 안고 가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카메라를 켜기로 했다.
2. 다른 사람을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라
얼굴을 직접 볼 수 없다는 점과 근무 시간이 탄력적이라는 점이 합쳐지면 때때로 난감한 상황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바로 "이 사람을 지금 불러도 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 때다. 점심 식사를 길게 하는 중일 수도 있고, 오늘 출근을 늦게 할 생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집에서 근무한다 한들, 우리는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며, 업무를 우선시해야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급하지 않은 업무라면 다음날 연락하거나 따로 메모만 남겨놔도 되겠지만, 효율적인 업무 진행을 위해, 다른 사람과 협업이 필요하다면 주저하지 말고 바로 멘션을 거는 자세가 중요하다. 이런 서로에 대한 remind 또한 업무 효율을 증진시키는 방안이다.
라고 말했지만, 사실 내가 잘 못 지키고 있는 것 같다. Not shy(있지 노래 아님)해질 필요가 있다.
3. 자신의 스케줄에 변동이 있다면 신속히 공유하라
탄력 근무제라고는 하나, 사전에 아무 말 없이 오후 4시에 출근하고, 한 시간 일해놓고 "저는 오늘 일정이 있어서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같은 팀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좋은 생각을 하진 않을 것이다. 탄력 근무제는 직원 개인의 일정을 직원이 스스로 조절할 수 있게 해주는 긍정적인 기능이 있었으나, 협업이라는 관점에서는 가끔 곤란한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기에 우리의 근무시간은 지정되어 있진 않으나,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근무시간"의 범위에서 근무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여겼으며, 평소보다 늦게 출근할 일이 생기거나, 일찍 퇴근할 일이 생기면 사전 공유를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게 되었다.
4. Context Switching(맥락 전환)을 해라
지난 번 글에서도 언급했었던 방법이기도 하다. 평소 출근하는 방식으로 옷을 입고 일을 하면 그나마 집중력이 올라간다는 것. 예전에 불면증을 고치는 방법 중 하나로 "침대에서 휴대폰을 하지 말라"는 조언을 본 적이 있었다. 이유인즉슨, "침대"를 온전히 "잠자는 곳"으로 인식이 된 상태에서는 침대에 눕기만 해도 잠들 수 있게 되기 때문이었다. 침대에서 TV를 본다거나 휴대폰을 보는 등의 딴짓을 하면 그 효과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잠자리에서 유튜브를 안 볼 수 있단 말인가? 건강하게 살고 싶으면 치킨과 피자를 평생 먹지 말라는 소리와도 같다)
이렇듯 사람의 의식은 맥락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게 공간일 수도 있고, 복장이 될 수도 있다. 서울에 살 때, 나의 자취방은 나에게 온전히 '쉬는 곳'이었다. 조금이라도 집중력이 필요한 일은 무조건 맥북을 들고 카페에 나가서 아메리카노 한잔 뽑아놓고 바깥 풍경을 구경하며 하는 게 국룰이었는데, 외출을 할 수 없게 되면서 내 방은 역할이 혼재되고 말았다. 개발자스럽게 말하자면, 단일 책임 원칙을 위반하게 된 것이다. 그 원칙을 위반한 대가는 나태와 태만이었다. 이는 원룸에 사는 동료들은 다 어느 정도 공감을 하는 사항이었다. 결국 사무실로는 안 가게 되었지만, 대신에 집에 어떤 형태로는 '사무실'을 물리적/논리적으로 배치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고향으로 내려갔다. 집이 넓으니 독립된 공간 확보를 할 수 있었고, 가족과 함께 생활하니 매번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애 쓸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고양이도 볼 수 있는데 안 내려갈 수가 있나. 이번에는 아예 각을 잡고 회사에 들러 아이맥과 키보드까지 들고 내려갔다.
잠깐 보고 가시죠. 공개합니다. 나의 홈 오피스
재택근무 시작했을 때, 가장 그리웠던 것은 아이맥이었다. 애초에 맥북은 나에게 서브 PC였고, 맥북을 쓸 일은 오로지 원격근무가 잡힌 날/ 회의실에 들어갈 때 뿐이었다. 맥북을 그렇게 차갑게 대하는 이유는 아이맥이 성능이 더 좋고, 화면이 크기 때문. IDE나 깃 설정, 터미널 알리아스 등의 세세한 설정들이 다 아이맥에 있었던 지라 재택을 시작하면서 이것들을 맥북으로 옮기는 작업을 해야했고, 옮기고 나서도 작은 화면과의 사투를 해야했다. 사실, 회사에서 장비 이동에 대한 경비를 지원해 주고 있었기에 아이맥을 들고 올 수 있는 기회는 늘 있었다. 그러나 그 좁은 서울 방에 가져다 놓을 공간이 마땅치가 않아 실행할 수가 없었다. 이번에 고향으로 내려감으로써 드디어 아이맥을 들고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야호
지름신이 오고 있음;;
집에만 틀어박혀서 아무도 만나질 못하고 있다보니, 무료함은 점점 더해가는데 돈 쓸 데가 없어지다 보니, 소비가 다방면으로 변했다. 코로나 사태 이후로 인테리어 관련주가 상승한 이유가 납득이 갔다. 지금부터 재택 이후로 내가 한 소비들을 열거해보겠다.
지름 1. 커피 사러 나갔다 오기도 싫다. 칼리타 핸드밀
본래 나는 커피를 자주 마시지도 않았고, 마셔도 바닐라 라떼같이 단 커피를 찾았지, 아메리카노는 거들떠도 안 봤었다. 그러나 입사 이후로 나는 커피 없이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고, 이렇게 단 커피만 찾다가는 당뇨로 요절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쓴 커피 애호가가 되고 말았다. 개발자들 사이에서 흔히 전해져오는 "개발자란 자고로 커피를 코드로 바꾸는 객체를 의미한다"는 밈이 사실임을 깨닫는다.
문제는 쓴 커피도 쓴 커피 나름인데, 레디메이드로 판매되는 아메리카노들은 거의 다 스위트 아메리카노라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 최소 카페에서 갓 내린 아메리카노 정도는 되어야 했는데, 집 앞에 투썸이 있지만 매번 왔다갔다하는 일도 생각보다 시간 낭비였다. 그래서 고심 끝에 핸드밀과 원두를 샀다. 처음 시도해보는 드립 커피였기에 초창기에는 흙맛이 나는 커피를 마셔야했지만, 요즘에는 꽤 그럴싸하게 내리는 것 같다. (근데 요즘엔 원두 갈기가 귀찮아서 그냥 투썸 다녀오고 싶다)
지름 2. 야근을 간지나게 하고 싶다. 양키 캔들과 캔들 워머
작년에 대학교 졸업을 하게 되면서, 동아리 후배들이 선물해준 향초가 있었다. 양키 캔들 제품 중에서 제일 작은 놈이었는데, 딱히 집에서 초를 피울 일이 없어서 영구 봉인했다가, 친구가 감성 낭낭하게 양키 캔들을 활용하는 것을 보고 뒤늦게 캔들 워머를 구매했다. "캔들 워머를 대체 왜 쓰지?" 싶어서 검색해봐도 딱히 캔들 워머가 뭐하는 물건인지, 왜 쓰는 지를 설명한 글은 단 하나도 찾지 못했는데, 일단 내가 이해한 바로는 이렇다. 향초에 불을 붙이고 끄는 행위에서는 일산화탄소가 발생하는데, 이게 사람 기관지에 상당히 안 좋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을 생각해서 "불을 붙이지 않고 향초를 태우는" 것이 가장 좋은데, 이 모순적인 행위를 할 수 있게 돕는 게 바로 캔들 워머다. 할로겐 전구를 이용해서 열로 향초 표면을 녹이고, 이를 통해 영롱한 빛과 향을 모두 다 잡을 수 있다는 것. 야근할 때 무드등으로 적합하단 생각이 들어서 구매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드등 역할을 하기엔 빛의 양이 다소 애매했고, 어째서인지 모르겠는데 캔들 워머를 써도 내가 자꾸 기침이 나와서 자주 사용하진 않게 되었다. 그냥 이 녀석은 정말 인스타그램용이 되었다.
지름 3. 책상 공간 아깝다. 모니터 암
나는 기본적으로 듀얼 모니터 상태로 일을 한다. 회사에서 일을 할 때에는 서브 모니터를 볼 때 목이 아프진 않았는데, 집에서는 유독 보기가 불편하게 느껴졌다. 각도와 높이가 달라서 그런가? 하면서 아쉬운 대로 쓰고 있다가, 문득 모니터 암을 달면 목도 덜 아프고, 책상 공간도 확보가 많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정작 사고나니 모니터암 쓴다고 해서 목이 안 아프진 않았다. 대신 각도와 높이 조절로 통증 정도는 줄일 순 있었다. 그리고 뜻하지 않은 부수효과(?)가 있었는데, 바로 연예인 직캠 보기가 편해졌다는 것. 전국의 아이돌 덕후들. 빨리 모니터암 사라. 최고다.
지름 4. 음악이야 말로 나라가 허락한 유일한 마약.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
사실 헤드폰은 살 필요가 없었다. 재택 근무할 때에는 집에 나와 동생밖에 없으므로 음악을 빵빵 틀어놓은 채로 방해 없이 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고, 때마침 할인된 가격으로 살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앞뒤 생각 안하고 질렀다. 지금은 종종 외출할 때 쓰고 나간다. 확실히 소니가 노이즈 캔슬링의 명가이긴 한 것 같다. (언젠가 나중에 리뷰 글 올릴 지도 모름)
내년에 다시 출근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이 녀석은 들고 갈 것 같다. 안 그래도 회사에서 고가의 블루투스 헤드폰을 쓰고 일하는 사람들이 부러웠는데 나도 이제 지지 않을 자신 있다(?)
다음 글은 아마 랜선 회식에 관한 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아마도 꼐쏙.